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국민당의 1차 북벌 (문단 편집) ==== 국민혁명군의 [[후난성|호남]]-[[우한]] 공략 ==== [[파일:북벌군1.png]] 한구 영국 조계를 지나가고 있는 북벌군. 적의 규모가 엄청났기 때문에 국민혁명군은 우선 [[직예군벌]] 우페이푸를 격파하고 쑨촨팡을 친 다음에 장쭤린을 상대한다는 전략을 결정했다. 첫번째 공격 목표는 우페이푸의 거점인 [[우한]] 삼진을 장악하는 것이었다. 우한은 한양, 한커우, 우창 세 도시로 이루어진 대도시로 80만의 인구에 공업과 상업이 발달한 도시였고 우페이푸의 무기고가 위치해 있었다. 그리고 신해혁명의 시작인 무창봉기가 일어난 곳으로 정치적 상징성도 있었다. 소련 고문인 [[바실리 블류헤르]] 등이 이곳을 우선 공격목표로 지목한 것도 당연했다. 7월 5일 탕성즈가 전선총지휘를 맡아 4,7,8군을 거느리고 호남성의 성도 창사를 목표로 북진했다. 북벌군의 정치공작이 주효하여 여러 군벌들이 싸우지도 않고 항복했고 철도노동자들을 비롯한 민중이 협조함으로 북벌군은 손쉽게 진격했다. 호북성 독리 진가모가 급전을 띄워 우페이푸에게 우한으로 돌아와 지휘해달라고 부탁하자 섬서에서 펑위샹과 싸우던 우페이푸는 장쭤린과 장쭝창에게 펑위샹 문제를 맡기고 급하게 남하했다. 우페이푸는 연수에서 방어선을 치고 저항했으나 북벌군은 손쉽게 격파하고 9일 상향, 10일 상담, 11일에 창사를 점령했다. 호남군 총사령관 예카이신은 퇴각했고 7월 12일 오전 3시, 장제스가 5만 명의 창사 시민들의 환영을 받으며 창사에 입성했다. 군기엄정한 북벌군은 군벌군과 달리 약탈, 강간을 비롯한 대민범죄를 자행하지 않아 환영을 받았다. 북벌군은 기세를 몰아 19일에 평강, 22일 악양을 함락시키면서 호남이 북벌군의 손에 들어왔다. 7월 25일 탕성즈를 주석으로 하는 호남성정부가 수립되었다. 여기까진 손쉬웠으나 호북에서부터 우페이푸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히게 되었다. 우페이푸는 전열을 정비하여 무창 남쪽 80킬로미터 지점의 정사교에 진을 쳤다. 이곳에 진덕린, 유옥춘 등이 지휘하는 우페이푸 휘하의 최정예부대 2만명이 집결하여 북벌군을 저지했고 이에 장제스가 하승교에 전선사령부를 설치하고 직접 독전에 나섰다. 4군이 7천명의 직예군을 사살, 포로로 잡고 정사교를 점령하자 우페이푸는 정사교에서 퇴각한 장교 9명을 본보기로 처형하고 정사교를 탈환하라고 지시했으며 퇴각하는 병사들을 처형하기 위한 독전대를 배치하여 퇴각하는 병사들은 칼로 베어 죽였다. 7월 27일 심야에 우페이푸군은 필사적인 공격 끝에 정사교를 탈환했고 북벌군은 퇴각했다. 28일 북벌군은 정사교를 다시 점령했으나 마제가 지휘하는 직예군에게 다시 빼앗기고 말았다. 29일, 장제스는 1군을 투입하여 정사교를 제압했고 오전 10시에 열차로 정사교를 건넜다. 8월 12일 장제스는 쑨촨팡에게 국민혁명군으로 귀순할 것을 제의했다. >"귀형은 강소, 절강, 안휘, 강서, 복건의 치안책임자를 맡고 있지만, 만일 혁명의 조류에 순응하여 인민의 행복을 보전할 수 있다면, 중정은 반드시 정부에 귀형을 5개 성의 총사령관으로 승인할 것을 요청하겠다." 하지만 쑨촨팡은 북벌군의 빠른 진격을 보고 북벌군을 경계하여 '보경안민'의 구호를 내걸고 자치운동을 벌이며 북벌군의 정치공작에 대항하는 조치를 취했다. 9월 1일 전선은 무창에 이르렀고 우페이푸는 2개 사단을 증강하고 홍산에 포대를 구축하여 무창을 요새화하였다. 우페이푸는 쑨촨팡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나 쑨촨팡은 눈치를 살피며 돕지 않았다. 9월 3일 오전 3시부터 북벌군의 무창 공격이 시작되었다. 야음을 틈타 결사대가 성벽을 올랐으나 중포와 기관총의 저항 때문에 막대한 사상자만 남기고 철수했다. 3일 심야에 장제스는 도가만에 도착하여 2차 공격을 지시했다. 5일 오전 3시, 북벌군은 다시 총공격을 감행했으나 실패했다. 하지만 9월 6일 16시간의 격전 끝에 한양이 함락되었고 9월 7일에는 한구가 항복했다. 이런 전황을 보고 8월 17일 모스크바에 머물던 펑위샹이 귀국하여 9월 17일 국민혁명군 합류를 선언했다. 9월 23일에는 북벌에 그동안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던 [[이오시프 스탈린]]마저 크게 기뻐하며 [[뱌체슬라프 몰로토프]]에게 "한구는 이제 중국의 모스크바가 될 것이다."라고 편지를 보냈다. 하지만 무창에서는 유옥춘이 완강히 저항하고 있었다. 이에 북벌군은 4군 소속 2개 사단과 포병들을 동원해 성을 포위하고 봉쇄전략을 실시한 다음에 강서성의 점령을 서둘렀다. 북벌군은 무창 성내를 비행기로 폭격하는 한편 '우페이푸를 타도하라! 불평등조약을 취소하라!', '장병의 투항을 권고한다!' 등의 삐라를 뿌려 선동했고 상인들에게 무창 안으로 식량과 금전을 제공하지 못하도록 엄명했다. 9월 30일 정저주에서 우페이푸는 군사회의를 열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우리 군대가 우한을 반격하지 못하면 직예, 산동연합군이 길을 빌려 와서 대신 공격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발 딛고 설 땅이 없고 하남성 역시 지켜 낼 수 없게 된다." 하지만 이미 장령들이 싸울 의지를 잃어 우페이푸가 우한을 공격하라고 반격명령을 내렸음에도 따르는 자가 없었다. 결국 북벌군 공병대의 터널 전략까지 격퇴하면서 저항하던 무창은 결국 포위 41일만인 [[쌍십절|10월 10일]] 오전 7시 30분에 항복했는데 이날은 마침 신해혁명 15주년 기념일이었다. 장제스는 무창에 입성하여 열병식을 거행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